壬辰倭乱及丁酉在乱时期李舜臣有很多以少胜多的海战战果,鸣梁海战就是其中之一,可以说李舜臣确实有一定实力。
陈璘也曾建议李舜臣入仕大明。
“统制使有经天纬地之才、补天浴日之功。
”“呜呼统制!
远藩邦家安危之智,提一旅之残疲,县之黑子。
绝敌西窥,修我内备。
枕戈浴铁,终日或不暇给;缮艘制器,卒岁无少已。
招徕流离者万家,畔贼逃归者千计。
露梁之战,统制前锋,舳舻几陷,我且汝卫。
而既脱于虎口,贼由是失锐,徐且战以且却,遂禽狝而草薙。
余谓统制可免夫斯祸,孰知中流矢而捐逝?
”忆而平居对人,尝曰:“辱国之夫,只欠一死。
”顾今境土既归,大雠已复,缘何犹践夫素厉?
呜呼统制!
该国凋残,谁为与理?
兵戎狼狈,谁为振起?
岂惟失祈父之爪牙,且丧令鲜之百雉。
缅怀及此,讵不流涕?
灵魂不昧,鉴是泥沚。
这是陈璘对李舜臣的评价。
“李舜臣,好汉子也。
收拾战船于散亡之余,能立大功于摧败之后,极可嘉奖。
”这是杨镐(明待将领和大臣)对李舜臣的评价。
2022韩国动作片《闲山:龙的出现》,根据真实事件改编,豆瓣评分6.4,IMDb评分6.7。
本片是2018韩国海战片《鸣梁海战》的前传,讲述年轻时代李舜臣对抗日寇的故事。
只是时间线在《鸣梁海战》之前,故事内容和《鸣梁海战》没有关联。
没看过《鸣梁海战》也没有影响,可以作为独立电影观看。
作为海战片,CG特效肯定比重很大,可惜虽然与《鸣梁海战》时隔4年,但是CG水准提升不大,细节不真实,有明显的模型感觉,有明显的动画感觉,这一点在《鸣梁海战》就有所体现,没想到4年后的2022年仍然如此,显然是投资不够。
最糟糕的是年轻李舜臣的饰演者朴海日的表演,角色塑造一塌糊涂,他为了塑造李舜臣的沉稳和老练,全片面无表情一个样,台词没几句,似乎演员认为只有这样才能衬托出李舜臣的沉稳和老练。
面无表情到三棒子打不出一个屁的憋气程度,让人看着想发火,越看越闹心。
韩国反派混混专业户朴智焕在片中饰演了造船官兵,戏份很少,是个正面形象,经过化妆,完全看不出他的混混气痞子样。
演员塑造角色,一靠化妆,二靠表演,这两点做好了,就可以脱胎换骨。
本片相比于《鸣梁海战》,重在体现海战的排兵布阵,用CG呈现了波澜壮阔的上帝视角大场面海战(但可惜CG特效水准不行)。
但由于剧本有问题,本应很精彩的排兵布阵、敌我双方在战略战术上的斗智斗勇,却讲述得乱糟糟,只有其形,没有其实。
期待很高,失望很大。
海战主角龟战船很有意思,负责横冲直撞,在海战中起到了重要的扭转局面的作用,最后龟战船被围攻、开足火力四面开炮、瞬间歼敌的高潮戏,脑洞够大,娱乐性够强。
片名副标题“龙的出现”很差劲,直接剧透高潮戏,让高潮戏毫无惊喜,考虑到《鸣梁海战》的片名,本片作为李舜臣三部曲的第二部,显然应该叫做《闲山海战》最为理想,而且还能傍上《鸣梁海战》的大牌。
年轻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这才是当时历史的真实记录。
闲山岛大捷又称闲山岛海战,是1592年8月14日朝鲜与日军在闲山岛附近的一场重要海战。
朝鲜将领李舜臣的水军在此次海战中击沉63艘日船。
为了与朝鲜水师进行决战,日本水师在巨济岛一带集结,准备兵分三路向朝鲜水师发动进攻。
而李舜臣则将其全罗道的舰队和庆尚道的部分舰队组成联合舰队,准备迎战。
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8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李舜臣选择在此地决战是因为这里有著较为宽阔的深水环境,易于设置埋伏,可以向日本舰队进行包围歼灭。
1592年8月13日有平民回报说看到倭舰在巨济岛附近集结。
得到消息后的第二日清晨,李舜臣派出6艘板屋船去引诱日舰。
胁坂安治的海军见到板屋船后,马上追踪上来,一直追到闲山岛附近的广阔海域,与李舜臣的海军相遇。
在李舜臣与日军的前两次交锋中,李舜臣采用的是线型或圆型的连续式的进攻阵型。
虽然这种战术对于击溃敌方舰队很有效,但是也会让很大一部份的敌舰得以逃脱,这样无法有效消灭敌方军力。
为了克服这个缺点,李舜臣在此次海战中摆出了新型的鹤翼阵或称U型阵,意在不但要击溃日本舰队还要将之包围进而歼灭。
日军的战术是先派出快速的军舰突击然后迅速派出主力战舰靠近并登船。
日军的这种战术正中李舜臣的圈套。
朝鲜海军以鹤翼阵将接近的日舰包围住,舰上炮火从各个角度将被围的日舰摧毁。
战斗从早上一直打到傍晚。
在丧失了59艘战舰后,胁坂安治开始撤退,朝鲜水军获得大捷。
李舜臣事后在“见乃梁破倭状”中宣称击毁的日本舰队为大船36只、中船24只、小船13只、击破数63只,但是根据胁坂安治领地的石高算出的动员定数大约为1500人,这个战果数应当是过高了(次年5月日军攻击晋州城时胁坂军统计为900人,而且之前有相当一部分日军士兵回国休整,因此此战日军伤亡应较低)日本水师依然掌握着制海权。
朝鲜国王后来命令李舜臣主动攻击日军补给线,但被李舜臣拒绝。
这在日后也成为了李舜臣被撤职的一个主因。
이때 동래(東萊)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대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그런데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약속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회합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전선(戰船) 80척을 거느리고서 마침내 이해 5월 6일에 옥포(玉浦) 앞바다로 나아가니, 적선(賊船) 30여 척이 사면에 휘장을 두르고 길다란 장대를 세워 홍기(紅旗)·백기(白旗)들을 현란하게 달았으며, 나머지 왜적들은 육지로 올라가 마을 집들을 불사르고 겁탈하였다. 왜적들은 수군(水軍)을 보고는 노(櫓)를 빨리 저어 진지(陣地)를 나와 아군(我軍)과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아군이 적선 26척을 불살라 버렸다. 이튿날 다시 대전(大戰)을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이 도착하지 않아, 그대로 서로 모여 통곡하고는 마침내 9일에 제각기 본진(本鎭)으로 돌아갔다.29일에 순신과 원균이 재차 노량(露梁)에서 회합하여 적선 1척을 만나 불살라버렸는데, 조금 후에 보니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들어온 조수(潮水)가 벌써 빠져나가 바닷물이 얕아져서 큰 배는 나아갈 수 없었다. 순신이,"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한창 전투할 적에 철환(鐵丸)이 순신의 왼쪽 어깨를 명중하였다.2일에 당포(唐浦)에 도착하니 적선 20척이 강 연안에 죽 정박하였는데,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고 밖에는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워놓고서, 적장(賊將)이 금관(金冠)에 비단옷을 입고 손에 금부채를 가지고서 모든 왜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배를 돌려서 노를 재촉하여 바로 그 밑으로 돌진하여 그 배를 쳐부수고, 적장을 쳐다보고 활을 쏘니 시위를 놓자마자 적장이 거꾸러졌다. 4일에 당포(唐浦) 앞바다로 나아가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 회합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운이 증가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5일에 외양(外洋)으로 나가다가 적선이 고성(固城) 당항포(唐項浦) 앞바다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듣고, 순신이 배 3척을 먼저 보내어 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바다 어귀를 나가자마자 바로 포(砲)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앞뒤를 고기꿰미처럼 연결하여 나아가 소소강(召所江)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강 연안에 죽 벌여 있었다. 그 중에 큰배 한 척은 위에 3층 판각(板閣)을 설치하고 뒤에는 검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워 놓았으며, 휘장 안에는 여러 왜적들이 죽 나열하여 시립하고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처음 한번 교전하고 거짓 패한 척하여 퇴각하니, 층각을 세운 큰배가 돛을 달고 먼저 나왔다. 모든 군사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러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 불을 질러 적선 1백여 척을 소각해 버리고 왜적의 머리 2백 10여 급(級)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적은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 6일에 잔여 왜적을 외양(外洋)에서 추격하여 또 한 척을 불살라버렸으며, 9일에 모든 군사가 전투를 중지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時, 東萊旣陷, 賊長驅直進, 所向無前, 大駕旣入西路, 黃海以南, 至于東萊, 惟聞敗報, 絶無他信。
慶尙右水使元均, 與全羅左水使李舜臣, 約會閑山島。
時舜臣以戰船八十艘, 乃於是年五月初六日, 進至玉浦前洋, 有賊船三十餘艘, 四面圍帳, 竪立長竿, 亂懸紅白旗, 餘賊登陸, 焚怯閭家。
賊見舟師, 促櫓出陣, 與我軍相遇於洋中, 我軍焚賊船二十六艘。
約以明日更擧大戰, 聞大駕西幸, 諸將不到, 仍爲相聚痛哭, 乃於初九日, 各還本鎭。
二十九日, 舜臣、元均再會於露梁, 遇賊一船焚之, 俄見海邊一山, 有賊百餘長蛇而陣, 其下有戰船十二艘, 緣崖列泊。
時早潮已退水淺, 大舟不得進。
舜臣曰: "我佯退, 賊必乘船追我, 引出洋中, 巨艦合擊, 蔑不勝矣。
" 回船未一里, 賊果乘船追之。
我軍令龜船突進, 先放大小銃筒, 盡燒其船, 餘賊遠望頓足叫呼。
方戰鐵丸中舜臣左肩。
初二日到唐浦, 賊船二十艘, 列泊江岸, 中有一大船, 上設層樓, 外垂紅羅帳, 賊酋着金冠錦衣, 手執金扇, 指揮諸賊。
中衛將權俊, 回船促櫓, 直衝其下, 撞破其船, 仰射賊酋, 應弦而倒。
初四日進至唐浦前洋, 全羅右水使李億祺, 領戰船二十五艘來會, 諸將無不增氣。
初五日出外洋, 聞賊船移泊於固城 唐項浦中洋, 舜臣先遣三船, 往探形勢, 纔出海口, 卽放砲告變。
諸軍一時促櫓, 首尾連亘, 魚貫而進, 至召所江, 賊船二十六艘, 擺列江岸, 中有一大船, 上設三層板閣, 後垂黑綃帳, 前竪靑蓋, 帳內諸賊, 擺列侍立。
諸軍初一交戰, 佯敗而退, 層閣大船, 懸帆先出。
諸軍挾擊, 賊酋中箭而死。
諸軍乘勝縱火, 焚賊船一百餘艘, 斬賊首二百一十餘級, 溺水死者不記其數。
初六日, 追餘賊於外洋, 又焚一船, 初九日, 諸軍罷兵還鎭。
七月初六日, 舜臣與億祺會于露梁, 元均修緝破船七艘, 先來留泊。
聞賊船七十餘艘, 自永登浦, 移泊於見乃梁。
初八日, 舟師至中洋, 賊見我軍盛, 促櫓而歸, 諸軍追至, 則賊船七十餘艘, 列陣於內洋, 地勢狹窄, 且多險嶼, 難以行船。
我軍進退誘引, 賊果悉衆追之, 引出于閑山前洋。
我軍擺列爲鶴翼陣, 揮旗鼓譟, 一時齊進, 連放大小銃筒, 先破賊船三艘, 賊氣挫少却, 諸將軍吏, (勸)〔歡〕 呼踴躍。
乘銳崩之, 箭丸交發, 焚賊船六十三艘, 餘賊四百餘名, 棄船登陸而走。
初十日, 至安骨浦, 賊船四十艘, 列泊洋中。
其中一船, 上建三層大屋, 二船建二層屋, 其餘諸船, 鱗次結陣, 其地狹窄。
我軍再三誘引, 賊懼不敢出, 我軍出入搏戰, 幾盡燒之。
是役也, 三陣所斬二百五十餘級, 溺水死者, 不記其數, 餘賊乘夜而遁。
舜臣等遣其軍官李冲, 馳啓獻級, 行朝上下, 無不踴躍稱慶。
【冲之來也, 上問以嶺南之事, 對曰, 聞監司金睟在咸陽云, 而聲問不通。
賊由直路而上, 故左右道分爲兩界, 號令不通云。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6月21日 第四纪事비변사가 아뢰기를,"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 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備邊司啓曰: "慶尙道 元均獻捷啓本, 卽頃日李舜臣 閑山等島一時事也。
臨戰首從, 功之大小, 必有差等於其間。
而在此的知爲難。
以斬敵論大槪, 戮力血戰則無疑。
再參一等, 似當別爲褒賞。
僉使金勝龍、縣令奇孝謹特陞堂上, 縣監金遵階三品陞敍, 主簿元㙉五品陞敍, 禹致績等四人六品陞敍, 李孝可等十三人相當職除授。
萬戶韓百祿前後之功最多, 而至於中九之後進戰, 戰罷不久, 竟至於死。
極爲慘惻, 亦堂上追賜。
陪持人朴致恭斬三級、生擒一倭, 六品陞敍何如?" 答曰: "當依此爲之矣。
元均則不爲加資乎?" 回啓曰: "元均已受重加, 且今玆戰捷之功, 李舜臣爲主, 元均似不必加資矣。
"朝鲜王朝实录 宣祖实录 宣祖25年 8月21日 第二纪事我这才是当时历史的真实记录。
棒子国战争海战主旋律片。
为了不被亡国,李舜臣带领棒子国海军,与联合了陆军一起进攻的胁坂安治率领的岛国舰队在闲山附近进行海战,最后击败倭贼的故事。
故事一开始,棒子国老师用具有铁龙头的龟甲船大破倭贼。
但是倭贼发现龟甲船有它的弱点,比如铁龙头容易被卡住,不能快速离开,另外就是船的两翼比较薄弱,容易击破。
倭贼派出探子对龟甲船进行侦查,拿到了龟甲船的图纸,并了解到了鹤形阵的排布。
其实李舜臣早就安排工匠对龟甲船进行了改进。
胁坂安治了解了龟甲船的构造后,就开始收缴一些和自己一样水军的船只,并联合陆军准备来一个水路夹攻,击破李舜臣的水军大营。
李舜臣得到情报后,就联合陆地的义军,一起对抗倭贼。
李舜臣在海战中,先是派出熟悉峡谷的三艘船引倭贼来战,但是胁坂安治没有动,他的边翼部队不知是计,追赶过来,结果在海峡内被歼灭。
胁坂安治一直等到感觉陆地部队已经攻陷了棒子国要塞才开始出战,因为船速快,他们很快赶上了作为诱饵的船只,让李舜臣的鹤形阵成不了型。
幸亏改进过的龟甲船及时杀到,冲散了倭贼的阵型。
最后在倭贼的船只靠得足够近的时候,李舜臣把船队横了起来,形成屏障把倭贼一举歼灭。
陆地上,义军也成功阻截了倭贼的进攻,棒子国一举挫败了倭贼的全面进攻,并取得了战争的主动。
最后的海战很是精彩,让人观之血脉喷张,特别是看到倭贼的嚣张气焰,把他们一举打败,真心很解气。
当然最后棒子国的英雄举起了象征义气的旗帜才知道是棒子国的主旋律影片,有点用情过度了。
不过打得倭贼嗷嗷乱叫,还是蛮解气的。
龟甲船的改良还是不错,动了脑筋,也起到了决定性作用。
不过那个降了李舜臣的倭贼有点莫名其妙,就因为看出李舜臣爱兵如子,不像胁坂安治为了胜利不顾人死活,有点太过了吧,感觉比较儿戏,就为这个事,杀自己人,成了义军?
朴海日还是蛮稳的,就是脸有点僵硬,可能是为了反映李舜臣的,沉稳,运筹帷幄吧!
今天聊聊韩国电影《闲山:龙的出现》。
片名한산: 용의 출현/ 한산도대첩 / Hansan: Rising Dragon (2022),别名闲山岛海战。
韩国人拍了一部史诗性质的历史战争电影《闲山:龙的出现》,浓墨重彩展现了1592年朝鲜水军在闲山岛近海击败日本水军的“闲山岛海战”。
本片和《鸣梁海战》(명량 ,2014)一样,讲述的依旧是朝鲜水军大将李舜臣的故事。
如果影片只是表现这一场海战的话,那就还算不错。
但有意思的是,影片中不忘提及战争背景、夸大海战影响,其历史虚无主义就让人不得不吐槽几句了。
2013年《鸣梁海战》的大获成功点燃了韩国民众的爱国激情,成为韩国有史以来观影人数最多、票房最高的电影,续集也顺理成章地被提上日程。
制作方决定延续《鸣梁海战》的成功,再拍摄两部有关李舜臣的海战电影,8年后《闲山:龙的出现》成功上映,同样取得了肉眼可见的成功。
影片上映5天后就成为当年票房第三名。
《闲山:龙的出现》的故事发生在1592年,也就是《鸣梁海战》发生的前五年。
影片中日寇入侵朝鲜,把朝鲜军队打得节节败退,眼看着就要打下朝鲜王京汉城了,连朝鲜国王都跑路想向明朝求援。
此时所有的重担都落在朝鲜全罗道左水使李舜臣身上。
他要在海山阻击日寇水军,这样才能阻止日寇的灭国计划,以及随后的占领大明和天竺。
值得肯定的地方是,《闲山:龙的出现》在服道化上下了狠功夫,不管古代人穿的是什么样的,至少影片中呈现的状态能够让人相信这是一场气势恢宏的大决战。
灯光效果、视觉特效,都能看出经费在燃烧。
最后一场大战中,大量船只开始由远及近的史诗级战斗,士兵们也舍生忘死一般地扭打成一团,从娱乐性上来说是合格的。
在剧情设置方面,影片涉及爱情元素,但只是一笔带过,知道取舍,没有浪费任何笔墨,详略得当。
《闲山:龙的出现》的故事背景是发生在1592年至1598年的万历朝鲜战争。
万历朝鲜战争的起因是日本的野心。
1950年,猴子丰臣秀吉继承先主织田信长的遗志,结束了长达一百多年的战国时代,完成日本统一。
紧接着丰臣秀吉为了化解国内大名对土地分封的不满,同时实现个人野心,决定入侵朝鲜,然后再征服中国、进夺天竺,从而称霸亚洲。
战争开打1个月,日军就攻陷了朝鲜王京汉城,朝鲜国王李昖北逃义州,向宗主国明朝求援。
明朝派李如松统领4万大军抗倭援朝,李舜臣在海上也取得多次海战胜利。
直至1595年,万历朝鲜战争第一阶段结束。
1597年,日本以14万大军再次入侵朝鲜,朝鲜二次求援,明朝调7万兵力赴朝救援。
中朝联军在陈璘、邓子龙、李舜臣的指挥下,取得了鸣梁海战的胜利,但李舜臣和邓子龙壮烈牺牲。
这也是电影《鸣梁海战》的内容。
最终万历朝鲜战争以中朝联军的胜利告终。
万历朝鲜战争深刻影响了东亚政治军事格局。
朝鲜从亡国到复国,而日本则元气大伤,丰臣秀吉集团势力被大幅削弱,德川幕府崛起,这些都是后话。
《闲山:龙的出现》描写的只是万历朝鲜战争第一阶段的其中一次战斗。
战斗的过程基本也和电影中所描写的一样,1592年7月6日,李舜臣进兵出唐浦附近水域,并于7月7日清晨,将集结于巨济岛的日本水师引至闲山岛附近水域决战。
此处具有较为宽阔的深水环境,可以方便大军设置埋伏合围歼灭日军。
大决战中,朝鲜水军将日军包围,随后朝鲜水军直接冲撞日本水军,很快撞翻了日军前方的几艘大船,而其余朝鲜战船也奋勇杀敌,击沉日军40艘船,创下“闲山岛大捷”。
影片至此就结束了,但如果就此打住那也还好,可偏偏电影还要无限拔高这场海战的意义。
按照影片的说法,朝鲜水军的闲山岛大捷不仅打败了日寇,还拯救了大明王朝,绝口不提自己一个月被人攻占王京,跑到大明求援;也不说明朝军队援朝后,朝鲜人争夺指挥权;更不说此战之后,李舜臣的战术被日军掌握克制方法,日军以固守据点的方式对付朝鲜水军,李舜臣再无法取胜,釜山浦、长门浦、熊川、唐项浦、永登浦等后续海战全部失败……
《闲山:龙的出现》的副标题是龙的出现,但全片你都看不到龙在哪里,只有几只老乌龟一样的龟船在横冲直撞。
李舜臣克敌制胜的奇招就是全身披甲的龟船。
龟船吃水大、护甲高,依靠冲撞可以把敌船撞个大洞。
大家可以把龟船想成DOTA里的钢背兽,防御值极高。
《闲山:龙的出现》唯一说对的就是战争性质。
这是一场义战与不义之战。
猴子为了转移国内矛盾,悍然发动侵略战争,直接把东亚国家拉进泥潭。
三四百年后,日本人故伎重施,再次把东亚搅得鸡犬不宁。
我稍微看了一下西方国家网友的评论,他们说这部作品比起吴宇森的《赤壁》,更像是《300勇士:帝国崛起》,表示影片依靠CGI辅助提供了非常棒的体验,尤其是迷雾散去战舰现身的一刻,颇能打动人。
别看《闲山:龙的出现》讲述的只是漫长战争中的一个小到不能再小的战斗,导演却将故事表现得宛若一场世纪大战。
影片内容宏大且密集,从朝鲜、日本两个方面分别叙事,场景包含水路两条线,时间线跨越战争前后数日,给人的感觉就是这场战斗将决定万历朝鲜战争的最终走向。
但闲山岛大捷可不是赤壁之战那样的决定性战斗,可影片呈现出的效果就是很能唬人。
韩国总觉得自己是朝鲜半岛的正统继承人。
《鸣梁海战》《闲山:龙的出现》等一系列提振韩国人民族自豪感的电影颇为吃香。
但我们也不知道一个没有主权的国家怎么会产生这种错觉的?
韩日近几十年成为殖民地后,才变得安分守己,可不是这俩货本身是什么好鸟。
这可能和缺啥就要显摆啥一样,韩国男人对某种手势特别敏感,韩国的爱国热情也只能在历史虚无主义中自我高潮。
我们如果不拍摄属于自己的历史题材电影,恐怕以后连历史都要被偷国改写。
大逃跑可以拍成《敦刻尔克》,长津湖可以拍成《忠诚》,我们正面描写历史反而会被人指责战狼。
朝鲜神将拯救大明王朝,虚无主义殖人自我感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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还是那句话,输了避而不谈,赢了疯狂渲染……编剧竟能想到让一个倭寇心甘情愿为朝鲜倒戈?
还美其名曰正义感召,看着那个头顶空旷的家伙,我是真的觉得羞愧,这可是历史啊,你要这么玩,就给米国的英雄主义一个熊样……还有那句:“明朝免于倭寇进犯,局势扭转。
”哈哈,听我说谢谢你,因为有你,温暖了四季……之前偷文化,现在连功劳都偷,也不掂量掂量自己几斤几两,究竟谁帮了谁,心里没点13数吗……李舜臣是一个伟大的将领,可惜了,被后世之人如此描绘……
其实这部电影很好的诠释了棒子的劣根性,就是意淫。
从朝鲜时代金万重的《九云梦》就可以看出端倪,这种意淫特性是深入骨髓,烂在根子里,并且有历史传承的。
理解了这个,也就理解了棒子整个民族。
这种善于意淫,枉顾事实的特点在棒子身上表现得淋漓尽致。
史实是什么,对它们来说根本就不重要,它们只需要自己意淫一个故事出来达到自我满足就行了。
万历年间的抗倭援朝战争是很提气的一场战争,我想在银幕上看到李如松、李如柏所率明军最后的神勇,想看到丰臣秀吉时代所谓将星如云的小西行长、藤堂高虎、九鬼嘉隆的狼狈溃败,想看到规模使用火炮的明军炮轰拿火枪穿竹甲的日寇……可惜我们的导演编剧忙着穿越和胡编乱造历史剧,逼得我只能拿韩国的片子当历史片来看了。
李舜臣的几场局部战役被韩国无限拔高,甚至阻止了日寇天津登陆的企图,挽救了大明。
这么任意打扮,熟悉历史的也就一笑了之,你怨不得别人,你自己不屑一顾,只能由着别人说呗!
彼时朝鲜的军制、武器基本和大明一致,语言文字也一致,韩国历史题材电影的服化道都比较认真,因此我也是当历史片来看,努力从韩国将领身上寻找中国历史印记,这不得不说是一个悲哀。
又想起国师的《满江红》,你尊重历史,好好拍个岳家军抗金、十二道金牌召回、风波亭,弘扬爱国主义,不好吗?
日本国和韩国很大,都是宇宙国!
日本国和韩国很大,都是宇宙国!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对对对,导演说的对,日本国和韩国都很大,都是超级大国!
壬辰倭乱的时候是大国,现在更是不得了!
辽东半岛和山东被半岛估计是被导演吃了!
导演千万别说图里两个“小撅撅”是辽东半岛和山东半岛,这么一点点可赶不上导演的脑仁大!
导演太爱卞约汉,一度忘了这是讲李舜臣的电影
最后半个小时的海战看得很爽啊,尤其是那三艘龟船,真的是奇思妙想又出其不意,龟船头部还能伸缩真的是令人大吃一惊!
三部曲里面最闷骚 不说话 卖关子 让人着急的李舜臣 和后续的露梁海战故事人物有承袭
論抗日,棒子們從來沒輸過咱天朝。
文戏三部最差,武戏玩了一个阵法和龟船,日本船不如韩国船快、不如韩国船硬、不如韩国船灵活,炮都没有几门,纯靠鸟铳,这还玩啥玩,韩国海军这海上F1的水平可以碾压西班牙无敌舰队。
海战值得一看,其他缺点也很突出,宇宙国的无敌史观就不说了,大家都懂。可是看完给人感觉日本人一个个勇猛无比,朝鲜人一个个要么在哭要么马上哭了,主角不是李舜臣吗,可是胁坂安治比他戏份多了10倍吧,台词比他多了100倍吧,怎么有种长他人志气灭自己威风的感觉,但话说回来,这可能更符合史实。
无论是前期的间谍战,还是后期的海战都很精彩
韩国拍的抗日爽剧,在电影院看起来尤其爽啊!此外感受: 海战好特别;李舜臣全程面瘫,被打造成朝鲜诸葛亮。台译《韩山岛海战》。
这韩国大片拍的是真不错啊
韩国人真的会意淫啊
最后的海战还算精彩,比第一部好看,七分
韩国人现在商业片排得真可以,剧情能抓住人,场面也够大。
比上一部强
朝鲜永远都是日本想要挑战中国的跳板,可惜过去没有成功未来也必不可能成功!韩国人的大国梦都在电影里了…
嗯 原来是朝鲜阻止了日本入侵中国,棒子真敢拍
海战精彩 前面快进
还不如第一部
同样是意淫,区别就在于是不是为了洗钱
意淫大於實際,動畫為主,沒有什麼看點。
8年前,在乐天影院看的《鸣梁》,当时还曾无比期待中韩合拍的《露梁》。现在和周边国家关系搞成这个b样子,真是没想到。